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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인도(18.06.15~09.23)

(180622) 인도 사르나트(Sarnath), 인도 사람에 치이다 다시 인도 사람한테 치유받네

ㅇ 바라나시-사라나트 이동, 애증의 옷 수선집 아저씨

 

바라나시에 일주일 가까이 머물면서 보드가야(Bodhgaya)와 사르나트(Sarnath)의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됐다(이 정도로 계획이 없는 상태로 넘어왔다). 보드가야와 사르나트는 불교 4대 성지에 속한다. 지난번 네팔 룸비니(Lumbini)에서 부처님이 태어나셨고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사르나트에서 최초로 제자들에게 설법하셨으며 쿠시나가르(Kushinagar)에서 입적(入寂)하셨다 하여 불교 4대성지로 추앙받고 있다.

 

애초 계획은 바라나시에서 기차를 타고 타지마할(Taj Mahal)이 있는 아그라(agra)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를 방문하면서 부처님과 관련한 다른 장소도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계획을 바꿨다

 

사르나트는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10km 근방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어 하루 투어로 여행할 수 있었다. 네팔에서 같이 넘어온 동갑내기 친구는 바라나시에 별 흥미를 못 느껴 바라나시에서 합류한 다른 남자 동생 2명과 며칠 전 라자스탄 지역으로 먼저 떠났다. 혼자서 뭘 진행하려고 하니 그 친구들의 빈자리가 더욱 느껴졌다. 뭘 잘 몰라도 남자 넷이서 같이 다니면 어떻게든 해결됐는데 혼자서 하려니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경써야 해서 더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릭샤로 오갈 수 있는 거리라 릭샤를 불러서 흥정을 해야 했는데 마침 숙소 근처 골목을 오갈 때마다 항상 인사하고 기억해주는(그 많은 사람과 여행자들이 지나다니는데 어떻게 날 기억하고 아는 척하는지 지금도 신기할 따름이다) 옷 수선집 아저씨가 사르나트 투어 얘기가 기억이 나 그 아저씨를 찾아갔다. 거리에서 먹이를 기다리듯 달려드는 릭샤 아저씨들을 상대하기 보다는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을 통해 '믿을만한' 기사를 소개 받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나름 합리적 판단이라고 생각했는데 옷 수선집 아저씨에게 소개 받은 기사와 함께 사르나트로 이동하게 되면서 아 내 생각이 참으로 순진했다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옷 수선집 아저씨는 사르나트 왕복으로 태워다 줄 기사를 구한다고 하자 아주 환하게 맞이하며 자신이 아주 훌륭한 기사를 알고 있다며 걱정말라는 특유의 인도 사람의 능글맞음을 보여준다. 당시 얼마나 순진했냐면 그 수선집 아저씨가 나를 직접 태워다 줄거라고 생각하고 얘기를 꺼낸건데 자기가 알고 있는 기사를 소개해주고, 소개해준 대가로 중개료를 챙겨먹고 손을 털어버리는 식이었다. 

 

사르나트 왕복 비용은 400루피였고, 거기에 100루피를 따로 수수료 명목으로 그 아저씨에게 지불했다. 왕복 비용에 비해 수수료가 다소 지나친게 아닌가 싶었으나, 아저씨네 좁은 집 안에서(집 한쪽을 가게로 개조한 식이었다) 어린 딸이 나와 아저씨와 얘기하는 걸 보고 그냥 처음이니까 경험삼아 해보자는 식으로 넘어갔는데 그게 화근일 줄은 예상을 못했다.

 

아저씨와 함께 큰 길가로 나와 아저씨가 핸드폰으로 누군가 연락하자 곧 누군가 다가왔다. 동생뻘되는 앳되보이는 남자였는데 내가 봤던 오토바이 릭샤가 아니라 골프장에서 보는 카트를 가지고 와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카트가 시원하게 달리질 못해 아저씨한테 물어보니 카트에 충전을 못해서 그렇다고 했다. 아니 '믿을만한' 기사를 원했지, '준비도 안된' 기사를 소개해 주다니.

 

결국 그 카트는 멈춰섰고, 도저히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아저씨는 길가에 지나가는 다른 골프카트 청년을 불러 인수인계를 진행했다. 내가 지나가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방긋방긋 인사해주던 아저씨의 정성이 감사해 부탁을 드렸지만, 너무나 아마추어 같은 일처리 방식에 돈은 돈대로 주고 지금 뭐하는 건지 싶어 사르나트 가기 전부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사르나트에 도착하고 아저씨가 3시간이면 다 본다고 해서 돌아오는 시간을 약속하고 사르나트를 둘러보는데 날은 푹푹찌고 사원 규모는 생각보다 넓어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그냥 릭샤야 차고 넘치니까 가격 대충 맞으면 그거 타고 와서 둘러볼만큼 보고 다른 릭샤를 탔어야 했는데 이미 금액과 시간을 정하고 오니 벌써부터 다 못보고 가면 어쩌나 마음이 급해진다.

 

애증의 옷 수선집 아저씨(왼쪽)와 ''준비도 안된' 전동카트 기사

 

ㅇ 사르나트 유적, 예비 경찰관 청년과의 만남

 

기사가 알려준 입구 방향을 들어가니 사원 하나가 보인다. 그 옆에는 커다란 보리수 나무 아래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 다섯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하신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공간 입구에서 신을 벗어야 했는데 바닥이 햇볕에 잘 달궈져 있어 정말 정말 뜨거웠다. 사막에 도마뱀처럼 한발을 딛으면 다른 한발을 재빨리 올리는 식으로 황급히 그늘진 곳으로 피신해야 했다.

 

보리수나무와 부처님 조각상을 중심으로 티베트 불교 원통형 기도 도구인 마니차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마니차를 한번 돌리면 불경 글귀를 한번 읽은 것과 같다고 한다. 바닥은 뜨거웠지만 조심조심 마니차들을 돌리고 보리수 나무 아래로 들어간다.

 

부처님께서 다섯 제자들을 모아 처음으로 설법했다는 전법륜경(轉法輪經) 의 내용이 각 국가 언어로 번역되어 안내되고 있었다.  

 

비문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출가한 사람은

1. 감각적 쾌락(에서 발생하는 즐거움에 몰두하는 것)

2. 자기자신의 몸에 스스로 고통을 주어 괴로움에 몰두하는 것

 

두 가지 모두 무익하므로 멀리해야 한다.

 

나는 이 두 개의 치우친 길을 버리고 올바른 길 '중도(中道)'를 깨달았는데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의 길 팔정도는

'올바른 가치관, 생각, , 행위, 직업, 노력, 알아차림, 마음집중' 이다.

 

 

부처님이 다섯 제자를 모아 최초로 설법하시는 모습

 

최초의 부처님 가르침 『 전법륜경(轉法輪經) 』

 

부처님 뒤에서 고마운 그늘을 만들어주는 보리수나무의 족보?에 관한 설명이 있었는데 그냥 평범한 보리수나무가 아니었다.

 

사르나트에 있는 보리수나무는 1931년 12월 스리랑카에서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스리마하보디(Sri Maha Bodhi)' 보리수나무 가지를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한다. 아누라다푸라는 기원전 5세기부터 1000년 넘게 스리랑카의 수도였으며, 불교가 번성한 장소이다. 스리마하보디 보리수나무는 기원전 3세기 아쇼카 왕의 딸 상가미타(Sanghamitta)가 부처님이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장소에 있었던 보리수나무 가지를 가져와 심은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는 현존 수목 중 가장 오래된 나무라고 한다.

 

사르나트 보리수 나무의 연혁을 설명한 안내문

 

사원 유적을 보러 안쪽으로 가다가 한 청년을 만났다. 날은 더워 죽겠는데 가이드나 다른 호객을 하나 싶어 데면데면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런 쪽은 아닌 것 같아 사르나트 유적과 관련해 몇가지 물어보니 유창하게 대답해 주어 놀랐다. 마침 자기도 사원을 둘러보는 길이라길래 같이 보지 않겠냐고 한다. 좀전에 옷수선집 아저씨한데 한번 데인터라 여전히 미심쩍었지만 엉겁결에 같이 구경을 하게 되었다.

 

사르나트 사원은 기원전 3세기 아쇼카 대왕이 석주와 함께 건립했다. 중국 현장법사가 640년 방문했을 때 100m 높이의 스투파와 1,500명 수도승들이 거주했다고 서술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불교가 쇠퇴하고, 12세기 무슬림의 침략으로 사원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발굴현장 약도 
다마라지까 스투파(Dhamarajika Stupa) 둥근 원형터/ 붓다의 사리를 보관하고 있었으나 훗날 힌두교도들이 사리함 외에는 모두 갠지스 강에 버렸다고 한다. 사리함은 뉴델리 국립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발굴현장 내부

 

내부 현장에는 대부분 터만 남아있었지만 한번에 다 둘러볼 수 없는 규모에 이슬람의 침입 속에서도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직경 28.m, 높이 43m인 다메크 스투파(Dhamekh Stupa)와 다마라지까 스투파(Dhamarajika Stupa) 원형터, 아소카 석주 등 사원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자취를 통해 당시 사원이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다메크 스투파(Dhamekh Stupa)

 

다메크 스투파(Dhamekh Stupa)와 발굴현장

사르나트의 하이라이트는 아소카왕이 사원을 건립하며 남긴 아소카 석주이다. 본래 높이는 5m 높이였다고 전해지나 현재 파손되어 기단 부분은 본래 자리에 보호펜스와 함께 보존되어 있었다. 1950년 인도정부가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4사자상을 인도 국가문장으로 채택하였고 인도 화폐 루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소카 석주/ 석주 윗부분에 있었던 4마리 사자상은 유적 남쪽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었으나  푹푹찌는 더위로 인한 체력고갈, 인도청년과의 우연한 만남, 다음 여행지 기차표 구입일정으로 조기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인도 화폐 루피에 등장하는 4사자상

 

 

찢어질듯한 폭염에 쉬엄쉬엄 움직이다보니 어느새 릭샤 기사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다. 내가 늦을까봐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기사한테서 전화가 쉴새없이 울린다. 원래 계획은 유적지구를 둘러보고 근처 박물관에서 아소카 석주 4사자상 등 주요 유물들까지 보는 것이었으나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다시는 일정이 여유로울 때는 미리 시간을 정해서 이동하지 말 것을 이를 갈며 이동한다. 

 

사실 사르나트를 다 둘러보지 못한 이유는 초반에 인도 청년을 만나 같이 다닌 것도 있었다. 돌아다니면서 대화를 나누면서 이 친구가 생각이 깊다는 인상을 받았고, 박물관에는 못가더라도 이 친구와 깊은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 청년은 24살로 경찰 임용예정자였다. 현지에서 경찰의 권한도 크고 안정적인 직업이라서 무척 임용되기가 쉽지 않단다(그걸 합격한 당신은 도대체..). 사르나트에는 웬일이냐 물어보니 다른 지방에 있는 집에 가는 길인데 바라나시에서 가는 기차가 연착돼 시간이 비어 잠시 왔단다. 인도인은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불교를 믿냐고 묻자, 나 역시 힌두교를 믿지만 불교 역시 인도 역사에서 중요한 종교이기에 사르나트에 와보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영어도 유창하고 인도 전반에 관련한 정치, 경제, 역사, 문화에 해박한 모습이 무척 인상깊었다. 무엇보다 날씨가 정말 더워서 부담될까봐 혼자 구경해도 괜찮다고 했는데도 같이 다니며 주요 유적지에 대해 설명해 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 친구의 진심어린 환대에 오전에 오는 길에 인도 사람들한테 당한 것들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너무 큰 환대에 시간이 갈수록 부담스러워 마지막에 돈을 요구하면 어쩌나 이런 생각까지도 들었다. 하지만 그 청년은 내가 릭샤 기사와 약속한 시간이 다 돼  (사실 늦었다) 돌아갈 때까지 끝까지 함께 해주었다. 그의 선의를 계속 경계하고 의심한 내 자신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면서도 그 친구한테 참 고맙고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인도사람에 치이다 다시 인도사람한테서 치유를 받으니 인도는 참 알다가도 모르는 나라라는 생각이 더 커진다. 어쩌면 부처님께서 자신의 장소까지 왔는데 인도의 부정적인 면만을 바라볼뻔한 그렇지 않다고 나를 바로잡도록 도와주셨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무아미타불.

 

부처님과 젊은 청년 덕분에 사르나트 오기 전 생긴 감정의 찌꺼기들을 비워낼 수 있어 무척 감사한 하루였다.